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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을 굴리는 어린왕자와 여우, 다큐멘터리 <워낭소리>
평생 농사를 지어온 최노인에겐 30년을 부려온 소 한 마리가 있다. 소의 수명은 보통 15년인데, 이 소의 나이는 무려 마흔 살에 가깝다. 그는 최노인의 가장 좋은 친구이며, 최고의 농기구이고, 유일한 자가용이기도 하다. 최노인의 아내는 늘 남편이 소만 안다고 불평을 늘어놓지만 노인은 매일 소와 함께 산을 오르고 논에 간다. 그러던 어느 봄, 수의사는 소가 올 해를 넘길 수 없으리라고 선고한다. (http://movie.naver.com/movie/mzine/read.nhn?office_id=140&article_id=0000013060)
최노인과 소, 어린왕자와 여우 30년이라는 세월을 함께해 온 최노인과 소, 인간과 다른 종과의 소통. 이 생경한 관계 (이 관계가 생경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인간이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하기 때문이며, 인간이 이룩한 세계와 그 세계의 문화가 인간 외의 생명체에 배타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린왕자>와 같은 작품을 접할 때면 요즘 표현대로,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을 받는다.) 는 언제 읽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왕자>라는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만드는 것’이라는 <어린왕자>의 유명한 구절 말이다. “넌 아직 나에겐 수많은 다른 소년들과 다를 바 없는 한 소년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난 너를 필요로 하지 않고. 난 너에겐 수많은 다른 여우와 똑같은 한 마리 여우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나는 너에겐 이 세상에 오직 하나 밖에 없는 존재가 될거야…….” (쌩떽쥐베리, 2003, <어린왕자>, 김윤진 옮김, 소담출판사, p.68.) 최노인은 소를 길들였고 이 둘은 서로에게 이 세상에 오직 하나 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최노인은 매일같이 꼭두새벽에 일어나 소에게 먹일 죽을 끓이고 농사일 와중에 틈만 나면 소에게 먹일 꼴을 베러 간다. 할머니가 먹으려고 베어놓은 약초를 소에게 먹이고 소에게 해가 갈까봐 밭에 농약도 치지 않는다. 소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최노인이 시키는 대로 밭을 갈고 땔감을 진다. 마을 회관이건, 읍내 건 최노인이 가고자 하는 어디라도 그를 실어 나른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다. 이제 둘은 툭치면 부러질 것 같은 다리와 앙상하니 살가죽만 붙은 삐쩍 말라붙은 몸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그들의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게오르그 짐멜은 현대문화의 물적 토대를 이루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분화된 외적 기능의 담지자, 단순한 경제적 역할 수행자로 기능할 것을 강요받는다고 주장한다. (게오르그 짐멜, 2007, <게오르그 짐멜의 모더니티 풍경 11가지>, 김덕영 옮김, 길.) 이는 낯선 얘기가 아니다. 우리가 택배기사 아저씨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와의 소통이 아니라 넷 서핑을 하다 질렀던 신상품이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서빙하는 언니의 과잉 친절을 자신에 대한 호감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가 더 많은 돈을 벌어오기만을 은밀하게 희망하고 있으며, 몇 년이 지난 후 우리의 교우관계는 각자의 머리 위에 개인의 연봉액을 띄우고 비교하는 그런 관계가 될 것이다. 모든 인간관계는 양적인 것으로 전환된다. 이 익숙한 명제 앞에 최노인과 소가 서로에게 흘리는 눈물은 울림이 있다. 이 울림이 또렷하게 퍼져, 나의 눈에도 눈물이 고인다. <워낭소리>의 핵심적인 관계가 동일 언어와 문화를 매개로 소통하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과 동물의 관계인 까닭은 현대 사회의 인간관계와 거리가 먼 관계를 보여줌으로써, 관계의 본질적 측면- 순수성 -을 담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노인과 소의 관계로부터 느껴지는 울림에는 괴리감이 섞여있다. 마치, 읍내 병원 앞에 주차된 달구지와 승용차를 함께 담은 씬이 주는 괴리감처럼. 나이를 먹고 새삼스레 <어린왕자>를 들척일 때 느끼는 괴리감 섞인 위로처럼. 아니, 위로 섞인 괴리감처럼. 이것이 <워낭소리>가 현실을 피해 극장 안으로 들어온 관객들을 위로하는 방식이다. 스크린에 의한 나의 눈물은 스크린 밖 현실의 비극을 반증하는 것이다. 최노인과 소, 돌을 굴리는 어린왕자와 여우 하지만 나는 어린왕자처럼 풀숲에 엎드려 마음 놓고 눈물을 쏟아내지 않았다. 최노인과 소는 온전히 어린왕자와 여우는 아니었으며, 이 점이 나에게 의문으로 던져져 내내 나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한평생을 농사 지어 9남매를 장년으로 성장시킨 최노인은 생을 이어가기 위한 물적 조건이 결핍된 상태는 아니다. 또한, 거두어들인 수확물의 대부분을 자녀들에게 보내는 것으로 보아 더 많은 소비를 욕망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최노인과 소는 쇠락해가는 자신의 육체를 끝끝내 밭으로 이끌고 간다. 제대로 걷지 못해 기다시피 밭을 갈고 집에 와서는 두통으로 머리를 감싸 쥔다. 그러나 농사일을 멈추지 않는다. 왜 그럴까. 영화 내내 펼쳐지는 할머니의 잔소리와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최노인. 왜 그렇게 농사에 매달리는지 할머니도 이해할 수 없고 나도 이해할 수 없다. 영화에서 이러한 점은 관심 밖의 것이다. 감독의 헌사 - ‘유년의 우리를 키우기 위해 헌신했던 이 땅의 모든 소와 아버지들에게 이 작품을 바칩니다.’ - 는 한평생 농사일을 짓는 것도 모자라 생의 마지막까지 노동에 헌신하는 모습에 그저 경의를 표할 뿐이다. 이야기는 거기까지다. 그렇게 최노인은 나에게 낯선 타자가 되어버렸다. 최노인과 그에게 길들여진 소. 이 어린왕자와 여우는 거대한 돌을 끊임없이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고 있다. 부조리한 영웅, 시지프처럼 말이다. “물론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행위를 그만두지 않고 계속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다. 그 중 첫째가는 이유가 습관이다” (알베르 카뮈, 1997, <시지프 신화>, 김화영 옮김, 책세상, p.18.) 이기지도 못할 농사, 그만 짓자는 할머니의 지속적인 애원에 최노인은 그저 밭을 놀릴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일종의 소명의식으로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발가락 뼈마디가 다 망가지더라도 지켜야하는 그런 것일까. 최노인이 농사일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습관의 세계에 갇혔기 때문일 수 있다. 어릴 적부터, 남의 밭 일꾼으로 시작한 농사일이, 살기 위해 시작한 농사일의 굴레가 팔순에 가까운 지금에는 손에 박힌 굳은살처럼 몸에 박혀버린 것이 아닐까. 한편으로, 최노인의 행위는 죽음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스스로 확보하기 위해, 자신을 끊임없이 생활의 연쇄에 밀어 넣는 것으로 보인다. 죽음을 의식하는 순간 습관의 세계에 있는 개인에게 드리운 무용성의 그늘. 인간은 죽음을 의식함으로 인해, 소소한 집착에서부터 생을 내내 가로질렀던 것에까지 허망함을 느낀다. 죽음을 의식하는, 죽음이 가까워오는 인간이 느끼는 이 불안은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최노인은 농사를 멈추지 않는 것으로 죽음의 불안을 떨쳐내려는 것이 아닐까. 이는 농사꾼이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는, 회고하는 행위로서의 농사를 짓는 느낌이 아니라 하나의 집착처럼 느껴진다. 돌을 굴리는 자에게 필요한 것 “아침에 기상, 전차를 타고 출근,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보내는 네 시간, 식사, 전차, 네 시간의 노동, 식사, 수면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화․수․목․금․토,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어렵지 않게 이어진다. […] 다만 어느 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 ‘시작된다’라는 말은 중요하다. 권태는 기계적인 생활의 여러 행동들이 끝날 때 느껴지는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의식이 활동을 개시한다는 것을 뜻한다. 권태는 의식을 깨워 일으키며 그에 뒤따르는 과정을 야기 시킨다.” (위의 책, p.28.) 나의 최노인에 대한 감정은 때때로 내가 나에게 느끼는 감정, 주위 사람들에게 느끼는 감정, 세계에 대해 갖는 낯선 감정이다. 삶이란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질문을 던졌을 때, 인간은 괴롭다. 간명하게 답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괴로움은 고민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낯설음으로 끝난다. 아주 쉽게 삶의 행로를 결정하는 사람들, 무언가에 홀린 듯 오늘을 반복하는 세계에 대한 낯설음이며, 휩쓸리고 있는 자신에 대한 낯설음이다. 나는 삶의 귀결점에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 말할 수 없다. 알지 못한다. 다만, 권태로운 세계로부터 떨어져 긴장하는 것. 이 불편한 의식을 회피하지 않는 가운데, 삶에 대한 열망을 꺼뜨리지 않는 것. 그리하여, 자기 내재적이며, 자기 완결적인 자아를 욕망하는 것. 거기서부터 비로소 삶은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우리 사는 시대가 이를 촌스럽게 여긴다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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